0. 한 처음에 ...가/이 있다.

어느 등산가는 말했다: “산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산에 오른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의 종말에 관하여 논의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는 이 논의의 출발선에 서 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자. 역사의 종말은 인간의 경험적 인식의 영역을 넘어 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등산가 앞에 어떤 산이 가로 놓여 있듯이 자명한 것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대체 역사의 종말이 있느냐 없느냐는 근본적인 물음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말은 우리의 신앙의 종속 변수인가? 그럴 수 없다. 신앙은 신념과 다르다. 신념은 개인의 정신의 소산물이며 신앙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이 부르심에 대한 순종적 응답이 신앙이다. 하나님이 역사의 종말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확고한 한 내용물로 등장한다.

판도라 상자 신화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희망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근본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적 삶을 영위하려는 출발점에서 무엇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가?

0.1. “콩죽은 끓어오르고, 소는 콩밭에 들어가고, 갑자기 애는 방에서 자지러지게 울어대는데 설사는 쏟아져 나오려 하고....”

이 여자는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난처한 처지에 빠져 있다. 급박하다. 이것도 당장 처리해야 하고 저것도 당장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우선 순위를 정하여 차례대로 처리하면 될 일들이 아니다. 어느 하나를 먼저 해결한다는 것은 나머지를 다 망치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그 일들을 동시에 처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위기를 극복해 낼 가능성은 도대체 있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헤어나올 수 없는 곤경에 빠졌을 경우에 자연인은 대체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첫째로 대다수는 절망할 것이다. 절망한다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포기하는 것,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 용기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절망을 거부할 것이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을 거부한다는 것은 한 가닥 희미한 희망을 붙잡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외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늘이 무너지면 만사는 끝장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외치는 것은 현재의 역경이 아무리 극악하더라도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항거하는 것,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을 붙잡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장한 처신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무엇이 보증하는가 이다.

종교인이라면 이러한 곤경에 다음과 같이 대처할 것이다. 첫째로 더러는 초능력적인 구원자가 나타나서 이 곤경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바랄 것이다. 이 구원자는 초월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이거나 초월자 자신이다. 둘째로 더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구원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믿고 바랄 것이다. 첫째 것과 둘째 것은 상관적이다. 셋째로 더러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영원한 낙원이 있다고 믿고 거기에 들어가기를 바랄 것이다. 저 세상은 일반적으로 죽음 후에 영혼이 거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넷째로 더러는 삶의 의미를 물질적-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영적인 것으로 이원화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절망하는 것은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를 포기하는 태도이다. 저 세상의 구원이나 마음속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태도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면서 외치는 것은 희망이라는 한 가닥 밧줄에 매달려 현실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는 태도이다. 구원자가 나타나거나 구원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믿는 것은 현재의 역경을 견디어 내기 위하여 미래의 세계를 앞당겨 바라보는 태도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현재의 역경에 좌절하지 않는 것, 구원자 또는 구원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현실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현재에 앞당겨 오는 것, 미래의 빛으로 현재의 어둠을 비추는 것을 뜻한다. 희망은 현실 변혁의 목표점이며 추진력이다.

0.2. 사막을 여행하는 대상(隊商)이 있었다. 심한 폭풍 때문에 길을 잃고 오랫동안 헤매는 사이에 물도 바닥이 나고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다. 이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절망이다. 남은 것은 눈을 감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눈을 살짝 떠보았다. 그의 눈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오아시스다.” 이 외침에 죽어가던 사람들이 깨어났다. 그들의 눈에도 오아시스가 보였다. 그들에게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그들은 오아시스를 향해 걸어가서 살아났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모두 이렇게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결말나지는 않는다. 첫 사람의 눈에 비췬 그 오아시스가 그 사람의 환각 작용에 의한 환영(幻影)에 불과했다면 그는 결국 환영을 잠시 좇다가 죽었을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환영조차도 보지 못하고 다시 그 자리에 쓰러져서 죽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타난 것이 신기루였다고 하자. 그런데도 그것이 신기루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좇아갔다면 그들은 헤매다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오아시스가 실제로 나타나 보였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멀리, 그들의 여력(餘力)으로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그림의 떡’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0.3.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는 역사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가 많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희망을 천명한다는 점과 하나님이 이 희망을 약속하신 분이시며 성취하실 분이심을 믿는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이 과거에 자기 민족에게 이루어 주신 구원 사건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면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주신 구원 사건에서 희망의 근거를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서에 제시된 종말론적 희망이 나사렛 예수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통하여 일단 역사화 되는 변화 과정을 겪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논하는 과제는 구약성서에 예언된 종말론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종말론적 희망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신구약성서의 종말론은 단순히 어느 한 개인이나 한 특정한 집단의 운명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최종 목표, 인류 전체와 모든 피조물의 구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관심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미래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전 인류와 전 창조계에 선포하는 희망의 언어여야 할 것이다.

1.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부터 얼마동안 탈출하는 것이다. 여행기(旅行記) 또는 기행문은 여행 경험을 기록한 글이다. 여행은 장소의 이동에서 성립된다. 여행 출발지로서의 이 곳과 여행 목표지로서의 저 곳은 공간 속에 지금 동시적으로 나란히 존재해 있다. “저 곳에 가보았더니 이러이러하더라”하고 적어 놓은 여행기의 내용이 아무리 괴이한 것이라 하더라도 기록자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한 그것을 수용하는 데 인식론상으로 아무런 장애가 없다. 왜냐하면 사물의 공간적 지각, 즉 사물을 공간이라는 틀에 담아서 인식하는 지각 작용은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 작용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직관 형식에 속한다. 아무리 극단적 회의주의자에게도 공간은 그의 회의의 대상이 아니다. 공간은 그 회의자가 회의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공간이 없으면 그 회의자 자신도, 그의 회의의 대상인 그 사물 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큰 금고를 구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의심이 많다 하더라도, 자기 눈앞에 놓여 있는 그 금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이 존재하는 터전으로서의 공간 -장소- 은 인식 작용의 가장 확실한 기본 바탕을 이룬다.

1.1. 인격적 신(神)을 믿는 종교는 일반적으로 신을 초월적 존재로 이해한다. 초월 또는 초월적 세계를 공간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초월 또는 초월적 세계에 대한 가장 간편한 통속적인 이해 방식이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 또는 저 세상에 계시는 분이시다”라는 표현 속에 담긴 액면 그대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공간적 개념을 사용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액면 그대로 공간적으로 이해된 초월이 구원론과 결부될 때에는 중대한 과오가 생긴다. 오늘날 우리는 천문학 지식에 의하여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 공간에 은하계가 수억 개나 존재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상과 저 은하계의 세계들은 현재 동시적으로 나란히 존재해 있다. 그렇지만 저 은하계의 세계들은 말하자면 우리가 전혀 미칠 수 없는 먼 곳에 ‘초월해’ 있다. 은하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은하계는 이 세상으로부터 그저 초월해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의 초월성을 이렇게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의 구원관에는 이 세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결국 현실 도피주의자로 전락한다.

1.2 우리는 이제 한 특수한 여행에 나서려고 한다. 우리는 미래의 세계로 여행을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하여 ‘시간’이라는 선로(線路)에 얹혀 있는 차에 올라탄다. 그 차는 오직 앞으로만 진행하도록 고정되어 있다. 후진(後進) 장치는 아예 설치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시동을 걸고 최고 속력으로 미래를 향하여 돌진한다. 우리는 드디어 흥분 속에서 우리가 그리고 그리던 그 미래의 세계를 구경하기 위해서 창 밖을 내다본다. 이상하다. 웬 일일까? 바깥은 우리가 떠나왔던 바로 그 ‘현재’(現在)라는 이름의 마을이 아닌가! 우리는 또다시 전 속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어느 역에 멈추어서 창 밖을 내다본다. 그 역도 여전히 ‘현재’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미래 여행을 포기하고 ‘현재’ 역에 내린다. 우리가 떠난 곳도 ‘현재’라는 이름의 역이었는데 도착하여 발을 딛고 선 곳도 여전히 ‘현재’라는 그 이름의 역이다. 나는 나의 그림자를 영원히 잡을 수 없다. 나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나의 그림자는 한 걸음 씩 뒤로 물러난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미래 속으로 들어가려고 전진하면 할수록 미래는 뒤로 물러난다. 우리의 발은 언제나 ‘현재’라는 시점에 붙어 있다. 우리가 떠나온 어제의 그 ‘현재’라는 곳과 우리라 도착한 오늘의 그 ‘현재’라는 역은 동일한 장소이다. 그러나 어제의 그 곳과 오늘의 그 곳 사이에는 변화가 있다. 변화는 시간의 품에서 부화한다. 우리의 발은 언제나 ‘현재’라는 시점에 붙어 있기 때문에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라는 통전태(統全態) 형태로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시간이 낳은 자녀들을 지각할 따름이다.

1.3. ‘공간 여행’과 ‘시간 여행’은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간 여행에 있어서는 여행지가 출발 시점에 공간의 어느 곳에 동시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 여행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그의 출발 시점에 미래라는 시간이 동시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다. 미래라는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니까 현재의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시점에서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뿐이다. 현재는 미래를 끊임없이 갉아먹으면서 존재한다. 미래는 현재에 갉아 먹힘으로써 현재라는 양태로 그 모습이 드러난다. 문자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미래’ 여행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미래는 영원히 붙잡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현재 속으로 붙잡혀 왔다면 그것은 이미 현재이지 미래가 아니다. ‘미래’라는 시간은 아직 오지 아니 했으니까 없다. ‘과거’라는 시간은 지나가 버렸으니까 없다. 그러면 ‘현재’라는 시간은 존재하는가? 1억 분의 1초 이전(以前)도 과거 쪽으로 떼어 주고 1억 분의 1초 이후(以後)도 미래 쪽으로 떼어 주고 나면 ‘현재’라는 시간에 할당된 몫이 남아 있는가? 앞뒤로 떼어 주고 나면 남는 몫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말을 하는 이 순간에는 미래라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과거라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현재라는 시간도 발붙일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시간은 없는가? 어려운 물음이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시간 그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시간을 결코 과거·현재·미래라는 성분으로 구분하여 감지할 수 없다. 사물이 반드시 공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하듯이 시간은 사물과 밀착하여 나타난다. 우리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현상을 운동이라 하고 위치가 변하지 않는 상태를 정지라 한다. 물체의 운동과 정지 상태를 설명하는 데는 공간 개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물체가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이동하는 운동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시간이라는 선로(線路)를 따라가야 한다. 시간을 차용하지 않고서는 운동은 가동되지 않는다. 물체가 정지해 있는 경우에도 시간을 떠난 절대 정지 상태란 있을 수 없다. 물체가 정지해 있을 때에도 시간에게 임대료를 지불하면서 정지해 있다. 물체는 운동을 하거나 정지해 있거나 시간이라는 선로 위에 놓여 있다. 기차의 선로는 기차가 그 위를 달릴 때에 그 본래적 의미가 드러난다. 기차가 없는 선로는 무의미하다. 시간이라는 선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시간을 사물과 관련시켜 간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물과 관련되지 아니한 이른바 절대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각 작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A라는 시점과 B라는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도 결국은 시간의 선로 위에 놓여 있는 존재물의 존속하는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다. A라는 시점과 B라는 시점은 허허벌판에서 임의로 그어지는 시간의 눈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의 한 시간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어떤 시계의 시침이 11 눈금에서 12 눈금으로 옮겨가기까지 걸린 시간의 길이이다. 한 시간이라는 길이의 시간 흐름은 시침의 위치 변동으로 나타난다. 실제로는 시계의 시침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이 시침과 함께 움직여 간다. 사람은 어느 한 순간에 한 시간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한 시간이라는 길이의 시간을 실제적으로 체험하려면 정확히 한 시간이라는 길이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 경우에 시간과 그 체험 주체는 분리되지 않고 일체가 되어 함께 굴러간다. 이 시간의 체험 주체는 시간과 함께 그 자신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사물을 자기의 동반자로 하여 함께 움직인다. 시간은 단독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반드시 사람을 위시한 모든 사물들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존재가 시간의 흐름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경우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존재물의 생성, 성장, 소멸, 부패, 완숙 등등과 같은 질적 또는 양적 변화이다. 미래라는 시간 속을 앞질러 들어가 볼 수 있는 이를테면 ‘타임머쉰’(time-machine)과 같은 어떤 물리적 기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기구를 이용하여 우리가 거기에 도착했다고 가정하자. 만일 거기에 사물은 하나도 없고 시간만이 펼쳐져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사람처럼 아무 것도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과 유리해서 시간은 단독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미래에 있을, 또는 있어야 하거나 없어야 할 사물, 사태,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 미래의 사물, 사태, 사정은 현재에 존재해 있는 또는 존재하지 아니한 사물, 사태, 사정과 관련지어서 그려진 것이다. 거울 속의 영상은 사물의 직접적인 반영물이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영상은 허상이다. 성서의 종말론에 그려진 종말적 세계의 모습은 현재 세계의 직접적 영상도 아니며 현재 세계와 무관한 허상도 아니다. 종말적 세계의 그림 속에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할 현재 세계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성서의 종말론은 미래학의 미래 예측이나 점술의 개인 운명 진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래학은 현재에 사태에 인과율의 법칙을 적용하여 미래의 결말을 예견한다. 미래에 일어날 일은 현재 있는 일의 철저한 인과율의 연속선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일은 현재 일의 연장에 불과하다. 점술은 개인의 미래 운명을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본다. 미래학은 현재로써 미래를 예측하며 점술은 과거로써 미래를 단정한다. 이와 달리 성서의 종말론은 미래의 빛으로 현재를 비추어 본다. 성서의 종말론은 현실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이다. 성서의 종말론은 미래사(未來事)에 대한 한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제시된 답변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현실 속에서 좌절할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경계의 등불로 제시된 것이다. 종말론은 그것이 생성된 역사적 상황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 성서의 종말론은 상황에 따라 종말의 모습이 다르게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종말에 대한 성서의 여러 진술들로부터 종말에 대한 일관된 통일적인 상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다. 성서에 기술된 창조 설화로부터 창조 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 잘못임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성서의 여러 진술들에 근거하여 종말 사건들의 진행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수립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종말 사건들의 그림들은 백지 위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 색으로 설정해 놓고 그려졌다. 종말론 그림에는 관점이 두 개의 초점에 모아져 있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개의 초점이다. 이상이 배제된 현실은 혼돈하며 현실이 배제된 이상은 공허하다.

2. 오늘날 ‘종말론’이라는 용어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17세기에 이 용어가 교의학 교본에서 처음으로 사용될 때에는 그것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 즉 죽은 사람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죽음과 그 이후의 상태 등등에 관한 가르침을 뜻했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에서 논의되는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 일들(the last things)을 서술하는 데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최종, the last end)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데 관심한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인류가 수행하는 삶의 총 과정을 일컬어 역사라 한다면 역사는 도대체 마지막(=끝)이 있는가? 이것은 이른바 역사관에 관련된 물음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의 반복적인 순환 운동으로부터 유추하여 인간의 역사도 역시 흥망성쇠의 순환을 되풀이하면서 무한히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달리 역사란 끝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목표점을 향해 진행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성서의 역사관이다. 역사가 다다르는 이 마지막 목표점이 역사의 끝으로서의 종말이다. 이 종말은 그 때까지의 전 역사가 끝장나는 시점인 동시에 역사의 최종 목적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다. 종말에 이르러서 역사라는 가게는 폐업 처분을 당하는가? 그렇다. 그때까지 운영되던 가게는 완전히 폐쇄된다. 그리고서 전적으로 새로운 상품으로 채워진 전혀 새로운 가게가 개설된다. 성서는 이렇게 새로 시작되는 역사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일컬어 ‘하나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 부른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궁극적인 도래에 대한 신학적 논의이다.

2.1. 역사관과 종말론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관 관계에 놓여 있다. 종말론은 역사의 궁극적 목적과 의미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종말의 빛으로 비추지 않으면 역사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의 의미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지 않으면 종말의 빛은 떠오르지 않는다. 역사와 종말은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 역사는 종말에게 삼켜짐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 종말은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그것을 변혁하는 동력이 됨으로써 실제가 된다. 역사를 마차에 비긴다면 종말은 마차의 안과 앞길을 비춰주는 등불과 같다. 이 등불이 없으면 마차 안의 현상이 어떠한지, 마차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른다. 마차가 없으면 등불은 허공을 비출 따름이다. 종말이 없는 역사는 맹목이다. 역사를 도외시한 종말은 공허하다.

2.2.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신약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종말 사상이라고 폭넓게 일단 규정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의 내용을 규명하는 작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그것은 종말에 관한 신약성서의 모든 진술을 체계적으로 종합화 해 내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종말 또는 종말적 사건들에 대한 진술들은 신약성서의 저자들 사이에 엄청나게 상이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저자의 경우에도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진술들을 체계적으로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작업은 또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이 진술들은 종말 또는 종말적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제시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특정한 문제 의식과 관련하여 표명한 예언적 격려문이기 때문이다. 개개의 종말론적 진술은 그것을 생성시킨 특정한 삶의 자리(Sitz-im-Leben)와 관련시켜 해석하지 않으면 그 본래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특수하게 역사적 예수의 종말관과 등식화하거나 또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구축하려는 시도도 난관에 부닥친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의 종말관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에 속하며 그리스도 사건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신약성서 자체 안에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2.3. 신약성서의 종말론을 통시적 구도 속에 조명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의 종말론 및 중간기의 묵시문학의 종말론과 신약성서의 종말론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구약성서의 종말론과 묵시문학의 종말론과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전승사적 연속선 위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불연속 관계에 놓여 있는가? 이 두 물음에는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 양태의 종말론을 비교할 때에 하나님의 미래적 구원에 대한 희망의 표명이라는 공통 분모에 초점을 맞추느냐 아니면 종말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 진술 내용과 진술 방식의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진다. 신약성서의 종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사항을 다 고려해야 한다.

3.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미래 예언에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바 역사의 끝이라는 엄밀한 의미의 종말에 대한 진술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 운명에 대한 진술은 많이 있다. 구약성서로부터 종말론을 규명하려고 할 때에 참조해야 할 성서 본문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연구의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전체 역사 또는 전 인류의 종말에 대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진술들 사이의 비교치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검토해야 할 본문의 범위는 극히 제한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적 구원에 대한 희망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은 그들의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생성·유지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본문의 범위는 모든 예언서에로 확대된다. 우리는 둘째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구약성서의 종말론’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 진술된 모든 종류의 미래 예언을 망라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3.1. 구약성서의 모든 예언들을 시대별로 정확하게 배열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에 속한다. 그것은 모든 예언자들의 활동 연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도 어려우며 더욱이 개개의 예언서에는 후대에 형성된 예언들이 서로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B.C.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들, B.C. 587년 직전과 직후 경에 활동한 예언자들, 바빌론 포로기 후반 경에 활동한 예언자들, 포로기 종료 이후에 활동한 예언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B.C. 2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활동한 묵시문학가들로 대별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시대별로 당면한 역사적 위기의 성격이 상이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의 예언의 내용도 상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시대별 예언들의 내용을 색동 저고리의 색깔을 서로 구별하듯이 판이하게 구별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 전체적인 특색을 분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정한 무리를 무릅쓰고 우리는 예언자들을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기로 한다. 아모스(약 760-750년), 호세아(약 750-722년), 미가(약 750-690년), 제1이사야(약 741-701년)는 B.C. 8세기에 활동했으며, 스바냐(630년을 중심으로 10여년), 나훔(약 626-612년), 예레미야(약 627-587년), 하박국(약 608-598년)은 B.C. 7세기 후반에서 B.C. 587년 이전까지 활동했으며, 에스겔(약 593-563년)과 오바댜(587년 직후)는 B.C. 587년 전후에 걸쳐서 또는 직후에 활동했다. 제2이사야(540년쯤)는 포로기 후반에, 제3이사야(약 530-510년), 학개(약 520-518년), 스가랴(약 520-518년)는 포로기 이후 시대 즉 귀환 시대 초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이며 말라기(약 500-450년)와 요엘(약 400-350년)은 귀환 이후 2·3 세대 또는 1·2세기가 지난 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이다. 마지막으로 다니엘(164년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B.C. 2세기에 묵시문학적 작품을 남긴 예언자이다.

제1이사야(1-39장), 미가, 스가랴의 본문 가운데서 후대의 주요한 전승층을 구별해 내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종말 사상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미가 4-5장과 7장 8-20절, 이사야 24-27장과 33-35장은 귀환 후기 시대에, 스가랴 9-14장은 B.C. 4세기 또는 3세기에 생긴 전승층으로 분류된다.

3.2. B.C. 8세기 후반기는 유대 민족이 남북으로 분열된 지 2세기가 흐른 시기이다. 이 시기에 유대 민족 공동체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의의 팽배로 말미암아 내부적으로 붕괴 위기에 처해해 있었으며 남북의 두 왕국은 모두 약소 국가로 전락하여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탄압을 당해야 했다. 유대 사회가 야훼를 떠나서 바알 신을 섬겼다는 것은 평등·공생·공의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버리고 재물·권력·차별을 지향하는 이기주의적 가치를 숭상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조상 전래의 야훼 신앙은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예언자들이 등장한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회적·경제적 불의를 맹렬히 고발했다. 동시에 그들은 이러한 불의에 대하여 장차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통고했다. 이러한 심판이 일어날 시기를 가리켜 ‘야훼의 날’, ‘그 날’, 또는 ‘그 때’라 했다. 이 심판의 날은 멸망의 날이다. 그렇지만 이 날은 역사의 최후를 뜻하지는 아니 했다. 이 예언자들에게는 아직 ‘역사의 종말’이라는 의미의 종말 사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예언자들의 예언은 미래의 확정된 멸망을 미리 고지하는 데 역점이 놓인 것이 아니라 미래의 필연적 멸망을 예고함으로써 현재의 사태에 경고를 내리는 데 역점이 놓여 있었다.

3.3. B.C.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유다 왕국이 멸망한 사건은 구약성서에서 종말 사상의 발전에 하나의 큰 분수령을 이룬다. 이 사건은 청천벽력처럼 돌발한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이고 쌓인 유다 왕조의 실정과 사회적 부패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7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언자들 가운데서 특히 스바냐는 가장 맹렬하게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그는 이 멸망이 닥치는 시기를 ‘그 날’(19회)이라 일컬었다(3장 14-20절은 후대의 첨가이며 여기에 사용된 ‘그 날’은 예루살렘에 구원이 베풀어지는 날이다). 나훔은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유다의 구원을 예언한 1장 12-13절, 15절은 후대의 첨가이다). 예레미야는 B.C. 후반기의 후반부터 예루살렘 멸망 때가지 활약한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의 예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에게 내릴 징벌을 예고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박국은 유다 왕국이 바빌론 제국으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강대국의 횡포를 고발한다. 그는 절망에 빠진 유다 백성에게 ‘정한 때’ 즉 ‘종말’(2:3)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인키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라고 격려한다(하나님이 강력한 전사로서 등장하여 그의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모습을 노래한 3장은 후대의 첨가로 보아야 한다). 특이하게도 에스겔은 예루살렘 멸망의 전후에 걸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따라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고발과 그 멸망에 대한 예고가 담긴 전반부(1-24장)는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생긴 것이며(물론 여기에는 이른바 ‘사후 예언’도 많이 덧붙여졌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예언과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그리는 후반부(33-48장)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생긴 것이다. “끝(=종말)이 왔다”(7:2,3, 6,) 거나 “그 날이 왔다”(7:7, 12)거나 “그 날이 가까이 왔다”(7:7)거나 “그 때가 왔다”(7:7,12)거나 하는 표현은 유다 백성이 징벌을 당하는 심판의 날이 닥쳤다는 것을 뜻한다. 오바댜는 예루살렘 멸망 직후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오바댜서의 전반부(1-16절)는 에돔이 저질은 죄에 대한 고발과 심판, 모든 민족에게 내릴 멸망을 예언한 것이며 후반부(17-21절)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오바댜가 선포하는 ‘야훼의 날’은 모든 민족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15-16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승리의 날이 된다(17-21절). 제2이사야(40-55장)는 포로기가 거의 끝날 무렵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곧 귀국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3.4. B.C. 8세기 후반부터 B.C. 587년 사이의 예언자들과 포로기(B.C. 587-538년)의 예언자들의 예언의 성격은 판이하게 구별된다.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 멸망을 예고함으로써 그들을 경고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포로기의 예언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고발이나 멸망 선언은 전혀 없다(오바댜는 다만 에돔의 죄에 대한 고발과 그 멸망, 그리고 모든 민족이 심판받는 야훼의 날을 예언했다). 포로기의 예언자들은 고난 속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위로·격려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들은 나라도 망하고 없고 성전도 파괴되고 없고 백성도 흩어지고 없는 마당에 불의를 고발하고 멸망을 경고한다는 것은 허공을 향하여 외치는 것이나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초산을 끼얹는 것과 같은 잔인하고도 무익한 일이었을 것이다.

3.5. 포로기 종료 직후 시기 즉 초기 귀환 시대 (약 B.C. 530-500년)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제2 이사야의 꿈이 그대로 실현되지 아니하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실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구원의 소식을 선포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예언자는 제3이사야이다. 그의 예언에는 죄악에 대한 규탄도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묘사되는 우주적 차원의 구원 역사가 전개된다. 그 때에는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온 땅을 지배할 것이며 이방 민족들도 구원받은 백성의 대열에 참여할 것이다. 이사야 34-35장은 귀환 시대에, 24-27장은 귀환 후기 시대에 생긴 예언일 것이다. 이 두 곳에서는 멸망과 구원에 대한 모습이 더 과격하게 환상적으로 서술되었다. 미가 4-5장과 7장 8-20절, 스가랴 1-8장도 역시 초기 귀환 시대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이사야 56-66장과 유사하다. 학개는 B.C. 520-518년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 동안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 사업을 소홀히 한 것을 질책하고 그 때문에 농사에 소출을 올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독려하여 성전 재건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하며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높이 세워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여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스가랴와 학개는 이 구원이 실현되는 때를 가리켜 ‘그 날’이라 했다(슥 2:11; 3:10; 학 2:23).

3.6. B.C. 500-333년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는 말라기, 요엘, 스가랴(9-14장)이다. 말라기는 약 500-450년 사이에 살았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의 죄를 고발하고 심판의 날이 올 것을 예언했다. ‘그 날’은 악한 자들에게는 멸망의 날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3:2; 4:1,2,3). 말라기는 하나님이 자기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도록 사자를 앞서 보내시리라는 것(3:1)과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것(4:5)을 예언했다. B.C. 400-350년에 활동한 요엘과 B.C. 4세기 또는 3세기 경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스가랴 9-14장은 구약의 예언서들 가운데서 묵시문학적 색채를 가장 많이 띠고 있다. 요엘은 자연의 대 재난과 천체의 대 격변과 더불어 내리는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는 동시에(1-2장) 전원적 풍요와 평화가 넘치는 구원의 시대를 예언했다(2:21-24; 3:18). ‘그 날’ 또는 ‘야훼의 날’은 멸망의 날이기도 하며(1:15; 2:1,2,11,30,31; 3:14) 또한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3:1,18). 스가랴 9-14장은 아마도 그리스 지배 시대에 생겼을 것이다(9:13 참조). 범세계적 전쟁이 발발할 것과 예루살렘이 약탈당할 것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이 구원받을 것과 범민족적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했다.

3.7. B.C. 332년에 유대 사회는 페르샤 제국의 지배로부터 그리스 제국의 지배로 넘어갔다. 이 그리스 제국이 분열하여 생긴 셀류커스 왕조가 유대 사회를 지배하던 기간 중에서 B.C. 175년에서 163년까지 안티오커스 4세의 통치 기간에 유대 사회는 그의 강제적 헬레니즘화 정책 때문에 그 종교적·문화적·인종적 정체성을 송두리째 상실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극심한 박해를 당해야 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박해 상황 속에서 저술된 것으로 그 연대는 B.C. 164년경으로 추정된다. 다니엘은 그가 본 네 개의 환상과 그에 대한 천사의 해석을 통해서 나라들의 연이은 흥망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마지막에 한 영원한 나라가 설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의 차지가 된다는 것을 예언했다. 다니엘은 믿음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는 충실한 사람들에게 미래에 궁극적인 승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박해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기 위하여 이것을 썼다.

3.8. B.C. 8세기에 등장한 예언자들로부터 다니엘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에게 관통하는 공통적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시대별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각각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가게 운영에 관한 하나의 연극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유대 민족이며 이 연극이 전개되는 중심 무대는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매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예언자들이 그때그때 등장한다. 유대 민족의 역사를 하나의 연극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데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점은 하나님의 역할을 어떻게 비유하느냐이다. 하나님을 우선 연극의 연출자에 비유할 수 있다. 연출자가 연극의 진행을 이끌어가지만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지 않고 무대 뒤에 숨어 있듯이 하나님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이끌어가지만 하나의 배우로서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연기를 실연하는 분은 아니시다. 이 점은 예언서를 해석하는 데 가장 큰 난관을 이룬다. 왜냐하면 예언서에서 하나님이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的)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활동하시는 분으로 서술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일단 하나님을 연극의 연출자에 비유하기로 하자.

이 연극의 서막에는 아브라함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이 연극의 주역으로 선택받은 것이다. 그것은 미지의 곳에 가서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하나의 독자적 가게를 경영해) 보라는 지시이다. 아브라함은 여기에 응했다. 그러나 그는 이 가게를 개설할 자본금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는 못했다. 그는 다만 장차 가게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실현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

이 연극의 제1막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이 실현되는 장면이다. 이것은 이른바 시내산 계약에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들이 이제부터 경영해야 할 하나의 가게를 하나님으로부터 인수받는 것과 같다. 시내산 계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이 가게 운영과 관련하여 체결된 합의서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가게를 설립하는 자금과 운영비를 대여해 주신 분이시며 그들에게 그 경영권을 전적으로 위임하신 분이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사업을 계속 후원하고 성공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 측에서 이행해야 할 의무 사항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현재와 미래에 계속해서 복락을 누릴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에 반드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른바 신명기 법전에 잘 명시되어 있다(신 28-30장).

제3막부터는 예언자들이 무대에 주역으로 등장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가게 경영에 실패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마치 계리사가 기업의 대차 관계를 진단하여 그 실적을 평가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가게 운영의 실태를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평가하는 비평가들이다. 제3막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B.C. 8세기에서 B.C. 587년 사이의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들이다. 이들의 예언은 내용적으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부류로 묶을 수 있다. 이들을 일컬어 고전적 예언자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가게를 부실 기업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경영을 개선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곧 파산 선고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들은 냉엄한 비평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신명기 계약에 명시된 상벌 원칙을 적용하여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예고한다. 이들은 비관주의자들이 절대로 아니다. 이들은 비록 임박한 파산을 예언하지만 그것을 불변적 운명으로 고지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파산을 필연적인 것으로 예고함으로써 현재의 부실을 개선하도록 경고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제4막은 포로기의 장면이다. B.C. 587년에 유다 왕국은 망하고 성전은 불타 없어졌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늘이 무너진 것과 같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들의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맡겨진 가게가 파산당해 없어졌다는 것과 다름없다. 하나님의 성전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가게의 자본주이신 하나님도 역사의 무대로부터 무능하게 퇴출당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정복자로부터 그렇게 조롱을 당했다. 예루살렘은 폐허로 남은 채 지도층 인사들은 적국에 포로로 끌려와 끝없는 회한과 비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신세가 아닌가! 이러한 극단적인 절망적 상황 속에서 만일 한 예언자가 등장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그는 B.C. 587년 이전의 고전적 예언자들과 똑 같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전적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비록 적자 투성이이기는 하지만 가게는 존립해 있었기 때문에 엄밀한 경영 진단과 그에 따른 개선을 단행할 때 회생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불의를 신랄하게 고발하며 미래의 심판을 예고함으로써 현실을 변혁하려고 노력했다. 포로기의 예언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라가 망하고 민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없는 마당에 그들의 불의를 고발하고 징벌을 예고한다는 것은 사후 약방문과 다름없다. 포로기의 예언자는 먼저 더 근본적인 신학적 물음과 씨름해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셨는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과연 무능한 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하나님 자신이 이렇게 치욕을 당하고 계시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에스겔(33-48장)과 제2 이사야(40-55장)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답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이제 바야흐로 역사에 몸소 개입하신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과거의 자잘못을 불문에 붙이고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새로운 구원의 사건을 일으키신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솔선하여 행하시는 은혜로운 구원의 행위이다.” 포로기의 예언자는 절망에 빠져 있는 동족들에게 바야흐로 일어날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제5막은 귀환 직후의 상황을 나타낸다.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 나라 건설의 찬란한 꿈을 안고 귀환했다. 그리던 고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싸늘한 잿더미와 황폐한 농경지였다. 그들은 이러한 경제적, 환경적 악조건 속에서 새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제2 이사야가 제시한 꿈과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 엄청난 괴리가 생겼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독립 국가를 건설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게 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화목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형편이 점점 개선되어 갈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희망과 실망이 교차되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 등장한 예언자는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귀환 시대의 예언자들은 한편으로는 고전적 예언자들처럼 현실의 죄악을 고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포로기의 예언자들처럼 희망의 소식을 전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전적 예언자들과는 달리 심판 예언은 하지 아니 했다. 또 포로기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건을 오직 역사 과정 안에서 곧 실현될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회복과 결부시켰다면 귀환 시대의 예언자들은 이것을 역사의 원대한 지평과 모든 창조 질서의 궁극적 회복이라는 전망에서 바라보았다.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를 우리는 제3 이사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사정을 가게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귀향민들은 어렵사리 가게를 새로 건설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나날이 적자 운영인데다가 흑자로 돌아설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등장한 예언자들은 현재의 가게 운영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래에 더 완전한 새로운 형태의 가게가 설립되리라는 희망의 소식을 전했다.

제6막은 약 B.C. 500-200년 사이의 장면을 나타낸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의 형편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이 시기의 예언자들은 현재의 죄악을 고발하며 장래의 멸망을 경고하기도 하며 장래의 구원을 예언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야훼의 날’ 또는 ‘그 날’은 한편으로는 멸망의 날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사정을 비유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가게의 계속된 적자 운영으로 부채가 쌓이고 쌓여서 이제 곧 파산하느냐 어떤 극적인 탈출구가 마련되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예언자들은 멸망과 구원의 두 가능성이 판가름날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포했다.

제7막은 약 B.C. 200년에서 A.D. 100년 사이의 장면이 된다. 이 시기는 이른바 묵시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예언서가 산출된 시기이며 예수가 출현하고 신약성서의 대부분이 저술된 시기이기도 하다. 구약 정경 가운데서 다니엘서는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으로 분류된다. 묵시문학의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에 속한다. 다니엘서에서 후대에 충분히 발전한 모든 묵시문학적 작품들 속에 들어있는 묵시문학의 여러 가지 특색을 다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묵시문학의 주요한 내용적 특징은 선악 이원론적 세계관과 두 시대론에 근거한 이분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인간 사회에 악이 팽배한 까닭은 악신이 그것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며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은 인간 사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현재 전 우주적 차원에서 선신과 악신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선악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악이 지배하는 현재의 역사는 그 끝날 시점이 정해져 있으며 그 다음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고 보는 것이 두 시대론에 입각한 이분적 역사관이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질서 안에서는 즉 현존의 제도와 기구 안에서는 구원의 희망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산출되었다. 현실은 전적으로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송두리째 사라져야 하며 역사의 무대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짜여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묵시문학의 역사관이다. 묵시문학은 현실에 대한 그 특수한 이해 때문에 두 가지 정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 하나는 도래해야 할 세상에 대한 희망을 무기로 삼아 현재의 상태를 변혁하기 위하여 악의 세력에 용감하게 저항하는 급진적 역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을 도피하여 극도의 환상적 사변(思辨)에 빠지는 것이다. 문학 장르로서의 묵시문학의 문학 양식적 특징은 계시의 수령 방식에 있다. 즉 묵시문학가는 꿈 또는 환상을 통하여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나 피안의 세계의 비밀을 보게 되고 그 후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 본 것들에 대한 의미를 해석해 준다. 꿈 또는 환상에 나타난 것들은 기괴할 정도로 상징적 표현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해석을 붙이지 않으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묵시문학의 세계가 연출되는 무대는 이 지상에 한정되지 아니 하고 필연적으로 초월적 세계로서의 피안의 세계에까지 확장되며 출연하는 배역은 인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천사와 같은 신적 존재들도 포함하게 된다. 이 시기의 사정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나타낼 수 있다. 가게는 완전히 불한당들에게 점령당해 있다. 이들은 악신의 대리자들이다. 지금 우주적 차원에서 선신과 악신 사이에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정한 때가 되면 지금의 이 가게는 완전히 부셔져 없어지고 전적으로 새로운 가게가 건설된다.

3.9.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언자들의 활동을 7막으로 구성된 연극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이제는 그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와 그 위에 출연하는 배역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우리의 초대 관심은 ‘하나님’은 이 연극에서 역할을 하는 분이시냐는 물음이다. 하나님은 이 연극을 연출하는 분이시냐 무대 위에 직접 출연하는 하나의 배역을 맡은 분이시냐? 이 물음은 한 마디로 답하기 어렵다. 제1막은 신화적 표현으로 구성되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과 대면하여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제2막과 제3막에서는 하나님은 마치 연극의 연출자처럼 무대 배후에 숨어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건이 일어나게 역사의 무대 뒤에서 조종하는 분이시지 무대 위에 손수 등장하여 그 행위를 직접 실연하는 배역을 맡은 분이 아니시다. 물론 하나님을 무대 위의 한 배역처럼 묘사한 곳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 운행의 주인이심을 강조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겠다”(암 1:12)와 “그러므로 내가 랍바 성벽에 불을 놓겠다”(암 1:14)는 표현상의 차이일 따름이다. 둘째 경우에도 하나님이 랍바 성벽에 나타나서 불을 지르는 행위를 실행하셨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랍바 성벽이 불타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계획에 따라 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제4-6막에서는 분위기가 확연히 바뀐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곧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출연하시는 것으로 서술된다. “광야에 야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하여라”(사 40:3), “만군의 야훼 하나님께서 오신다.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릴 것이다. 보아라 그가 백성에게 줄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사 40:10), “너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 52:7), “야훼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사 52:8), “보아라, 야훼께서 화염에 싸여 오실 것이다”(사 66:15), “만군의 야훼께서 왕이 되실 터이니....야훼께서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사 24:23), “만군의 야훼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사 25:6),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사 35:4), “나 야훼가 그들을 시온 산에서 다스리겠다”(미 4:7), “그 날이 오면 야훼께서 예루살렘 맞은 편 동쪽 올리브 산 위에 발을 디디고 서실 것이다”(슥 14:4), “야훼 나의 하나님이 오신다. 모든 천군을 거느리고 너희에게로 오신다”(슥 14:5), “야훼께서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14:9) 등등.

제7막에 이르러서는 무대도 확장되고 배역도 늘어난다. 제1-6막까지는 무대가 이 세상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제7막에서는 무대는 신들의 세계인 저 세상과 전 우주로 확대되었다. 제2-3막에서는 인간만이 배역으로 등장하고 제1막과 제4-6막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배역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제7막에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천사와 귀신 등의 초자연적 존재들도 배역으로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무대는 곧 불타 없어질 것이며 전적으로 새로운 무대가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성서의 종말 사상의 발전에 있어서 이 제7막은 획기적인 단계를 이룬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른바 예언적 종말론에서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이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에서 신약성서적 종말론으로 이행된 단계이기 때문이다.

4. 성서의 종말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결국 어떻게 운행하시느냐는 실천적 물음에 대한 신앙적 해답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여러 가지 기복을 겪으면서 결국에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고 그것을 되찾을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역사의 상이한 국면에 따라 하나님이 여기에 개입하시는 방식이 상이하다고 보았다. 이스라엘 민족사의 여러 국면을 평상적 상황, 위기적 상황, 절망적 상황으로 분류한다면 하나님이 여기에 대응하시는 행동 방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서술된다. 평상적 상황에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로서 또는 시내산 계약의 주체로서 그가 세우신 창조 질서의 법칙 또는 시내산 계약의 상벌 규약을 통해서 이 창조 세계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지배하신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마치 기계 장치의 제작자가 그 기계의 제작 시에 주입시킨 물리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게 해 놓은 후에 그 기계가 돌아가는 현장에서 물러나 있는 것처럼 이 자연 세계와 역사의 무대 배후에 물러나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날마다 아침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날마다 그 해돋이 현장에서 아침해를 떠밀어 올리는 동작을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워 놓은 자연 법칙에 따라 그렇게 되게 하시는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복을 받느냐 벌을 받느냐는 것은 계약에서 정해 놓은 상벌의 원칙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위기적 상황에서는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특별한 조처를 취하시는 분이시다. 상벌의 원칙은 자연 법칙처럼 오로지 기계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 진노와 징계의 결의를 거쳐서 실시된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이러한 구원과 멸망의 사건을 수행하는 분이 아니고 마치 연극의 연출자처럼 역사의 무대 뒤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조종하는 분이시다. 절망적 상황은 극단적 위기 상황이다. 그것은 현재 상태의 개선에서 구원의 가망성이 전혀 없는, 마치 역사가 벼랑 끝에 내몰린 것과 같은 절박한 사태이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특단의 조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이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 위에 몸소 등장하여 이 역사를 정리하리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과연 역사 속에 직접 출연하시는 것이 가능한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간접적 역사 운행 방식에 대한 신화적, 상징적 표현 방법이 아니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물음의 답은 인간, 역사, 자연, 우주에 대하여 하나님이 뜻하신 궁극적인 계획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하여 찾아야 한다.

4.1. 마가복음 기자는 종말에 대한 예수의 선포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 활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 기쁜 소식의 내용을 다시 요약해서 제시하면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이다. “때가 찼다”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대응적 병행어구인데 묵시문학적인 이분적(二分的) 종말 사상을 나타낸다. 역사의 시간은 현재의 세대와 오는 세대로 양분되어 있는데 정해진 때가 되면 악신이 지배하는 현재의 악한 세대는 끝장이 나고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한다. 이 둘은 동일한 종말 사건의 양 측면이다. 그것은 임산부에게 달이 찼다는 것과 새 생명의 출생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 같은 일의 양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하나님의 나라’(he basileia tou theou)라는 표현 대신에 ‘하늘의 나라’(he basileia ton ouranon)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늘’은 ‘하나님’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낱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사용된 ‘하나님 나라’와 마태복음에 사용된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같은 의미이다. 이 두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와 관련하여 무려 100회 가까이 사용되었다(아래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대표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종말 사상을 규명하는 데 관건이 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는 단 한 번도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정의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 나라는 ...와 같으니”라는 형식으로 시작하는 이른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 이야기들도 실은 하나님 나라 자체가 무엇인지를 해명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이 어떠한지를 드러내기 위한 비유이다. 공관복음서에 ‘하나님 나라/하늘 나라/아버지의 나라/그의 나라/그 나라’라는 표현이 아무런 설명 없이 그렇게도 많이 사용된 것은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 기자들이 그 표현의 의미가 그들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알려져 있었다고 전제했기 때문인가? 그럴 수 없다. 역사적 예수의 선포의 직접적 청중이나 복음서의 본래적 독자들이라 해서 그것을 모두 한결같이 자명하게 이해했다는 것은 실제상으로도 원리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에는 ‘하나님’이라는 미지수(未知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인 한 그는 인간에게 남김 없이 알려진 존재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은 존재이시다. 더구나 하나님에 관하여 알려진 부분이라는 것도 각 사람은 그의 이해 능력과 삶의 처지에 따라 상이하게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서기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들이라 해서 여기에 예외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첫 출발점에서부터 인식론상의 딜레마에 빠진다. 우리는 고압 전류를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직접 감지할 수 없다. 고압 전류가 사람의 몸에 닿는 순간에 사람은 감전되어 죽어버린다. 우리는 고압 전류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전등의 빛이나 전열기의 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빛이나 그 열은 고압 전류 자체는 아니다. 필립 왕세자가 왕위에 등극하는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는 필립 왕세자가 몸소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필립 왕의 어떤 회사 건물이 건축되는 현장에는 필립 왕이 몸소 등장할 필요가 없다. 무용가 박보라(朴寶羅)의 춤이 공연되는 무대 위에는 반드시 박보라 씨가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안무가 고소라(高素羅)의 춤이 공연되는 무대 위에는 고소라 씨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 실현될 때에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출연하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무대 배후에서 그것을 연출하시는가?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범한 중대한 과오의 하나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행위 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한 채 오로지 역사의 무대 뒤에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 연출하시는 바 그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만 관심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데는 물론 유익한 점도 많이 있다.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괄호 속에 묶어 둔 채 그의 ‘나라’의 의미를 세계내적인 어떤 현실이나 가치로 환원시켜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 지성에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에 관련된 근원적 문제는 이러한 합리적 해석으로 다 해소되지는 않는다. 전쟁에 나가서 행방 불명이 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 이 여인의 안타까운 사정은 그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으로써만 해결될 뿐이다. 남편이 돌아오는 것을 대치할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가령 남편이 어디선가 살아 있다는 풍문을 듣는 것으로 또는 남편이 남겨 놓고 떠난 사진이나 남편의 뜻과 사랑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마지막 편지를 입수하는 것으로 그 여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허무에 휩싸일 수밖에 없으며 이 허무는 다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병에 걸렸다. 이 병의 치료사는 하나님 자신뿐이다.

4.2.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어떠한 전승사적 과정을 거쳐서 예수에게 이르러 종말적 구원 사건을 나타내는 핵심어로 사용되게 되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이 임박했다는 것을 뜻한다. 구약성서에는 예수의 종말 선포에서 사용된 이러한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아니했다.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나라’(he basileia tou theou)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야훼의/하나님의 나라’(‘malkut YHWH)이다. 이 히브리어 표현은 구약성서에 꼭 두 번 나타나는데 그것은 두 번 다 현존하는 다윗 왕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대상 28:5; 대하 13:8). 하나님이 ’나의 나라‘(대상 17:14)라고 표현하신 것도 현존하는 다윗 왕국을 지칭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과거에 그들을 구원하시고 현재에까지 그들을 돌보아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일컫기도 하고 (시 47:2,7,8; 74:12; 95:3; 98:6; 145:1) “하나님이 (우리를/온 땅을/만유를) 다스리신다/통치하신다”(출 15:18; 시 93:1; 96:10; 97:1; 99:1; 146:1)고 고백하기도 했다. 여기에 사용된 ’다스리다/통치하다‘는 낱말은 ’왕‘이라는 명사와 같은 어근으로 만들어진 동사이다. ’하나님이 왕이심‘ 또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심/통치하심‘을 하나의 어구로 표현하기 위하여 ’당신의/그의 나라‘라고 한다(시 103:19; 145:11,12,13). 이 경우에 우선 ’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말쿠트‘와 70인 성서의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단순히 ’왕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왕의 다스림/지배/통치/통치권/지배권/정권/왕권/‘을 뜻하기도 하고 ’왕의 지배 영역(=영토+영해+영공+국민)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왕의 지위/신분’(kingship)을 가리키기도 한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시 145:13), “사람들이 당신의 나라의 영광을 말합니다”(시 145:11), “당신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함입니다”(시 145:11)라는 발언에서 ‘당신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 영역으로서의 이스라엘 왕국이나 우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지배 그 자체를 뜻한다. 이것은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당신의 다스림(=‘memshalah')은 대대에 이릅니다”(13절)라는 동의적 병행어구에서 잘 드러난다. 그 뿐아니라 시 145편 전체는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이다(1-3절, 8-10절, 14-21절에는 하나님 자신이 찬양의 대상으로 되어 있으며 1-2절과 21절의 ’당신의 이름‘도 하나님의 인격 그 자신을 가리킨다). ’그의 위대하심‘(3절), ’당신의 위대하심‘(6절), ’당신의 권능‘(11절)을 찬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 하나님이 권능이 충만한 분이시라는 것을 찬양하는 것이다. ’당신의 위대한 업적‘(4절, 112절), ’당신의 놀라운 업적‘(5절), ’당신의 은혜‘(7절), ’당신의 의‘(7절)를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 은혜로운 행위, 의로운 구원의 사건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11절, 12절, 13절의 ’당신의 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다스림, 즉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능력/신분을 뜻한다. “그의 나라는 만유를 통치한다”(시 103:19)에서 ’그의 나라‘도 하나님의 왕권/통치권/지배권을 뜻한다. 즉 하나님은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나라’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논한 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뜻하는 소유격 대명사 ‘그의/당신의’와 ‘나라’가 결합한 경우에 ‘그의/당신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지배/통치 즉 하나님이 다스림/지배/통치를 행사하시는 행위/일을 뜻한다.

그런데 오직 이사야 6장 1절과 5절을 예외로 하고 포로기 이전의 고전적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지칭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고전적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을 고발하며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그들에게 내릴 징벌의 심판을 예고하는 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찬양하는 데 적절하게 사용된 ‘왕 칭호’는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2 이사야에 이르러서 예언의 기조가 확연히 바뀌었다. 바야흐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신다.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의 이 구원 행위를 서술할 때에 하나님이 직접 그의 왕권/통치권/지배권을 다시 행사하시는 것으로 묘사했다. “만군의 야훼 하나님께서 오신다.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리신다”(사 40:10),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사 52:7). 제3 이사야는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왕으로 일컫지는 않지만 그의 행위가 왕적인 구원 활동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능력을 발휘하실 것이다”(사 59:16). “너를 멸시하던 자들이 모두 너의 발 아래 엎드려서 너를 ‘야훼의 도성’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시온’이라고 부를 것이다”(사 60:60:14).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 받침대다’”(사 66:1). 이른바 이사야 묵시록(24-27장)은 귀환 시대의 작품으로 제2 이사야와 제3 이사야의 전통에 서 있다. ”만군의 야훼께서 왕이 되실 터이니 달은 볼 낯이 없어 하고 해는 부끄러워 할 것이다. 야훼께서 시온 산에 앉으셔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이며 장로들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사 24:23). 제2, 제3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의 직접적 구원 행위를 서술한 곳이 너무나 많다.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이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40:3).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43:19). ”내가 시온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46:15). ”나의 구원이 이미 나타났으니 내가 능력으로 뭇 백성을 재판하겠다(51:5). “야훼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것이다”(52:8). “야훼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리니 땅 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52:10).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56:1).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 주겠다”(57:18).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58:8). “야훼께서 시온에 속량자로 오시고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죄를 회개한 사람들에게 오신다”(59:20). “화려한 옷차림으로 권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바로 나다”(63:1). “야훼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면...야훼께서 친히 내려오셔서....”(64:1,3). “야훼께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60:5).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65:17). “보아라, 야훼께서 화염에 싸여 오시며 그의 병거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올 것이다”(66:15). 포로기 이후의 예언서에는 왕으로서 또는 구원자로서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언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야훼께서 그의 백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화살을 번개처럼 쏘실 것이다”(슥:14). “그 날이 오면 야훼께서 예루살렘 맞은편 동쪽, 올리브 산 위에 발을 디디고 서실 것이다”(슥 14:4). “야훼 너의 하나님이 오신다. 모든 천군을 거느리시고 너에게로 오신다”(슥 14:5). “야훼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슥 14:9). “그 때로부터 영원토록 나 야훼가 그들을 시온 산에서 다스리겠다”(미 4:7).

예언자들 가운데서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사를 서술한 단 한 사람은 오바댜이다. “구원자들(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영토를 다스릴 것이다. 나라가 야훼의 것이 될 것이다”(옵 21). 나라가 야훼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왕권/지배권/통치권을 회복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묵시문학에 이르러서 ‘나라’라는 용어가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계획을 알리는 핵심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백성에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도리어 다른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입니다”(단 2:44). 여기에 사용된 ‘나라’는 일반적 의미의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를 뜻한다. 그것은 국토, 국민, 주권을 포함하며 만일 그것이 왕국이라면 최고 통치권자인 국왕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하나님이 왕으로서 이 나라를 통치하실 것이라는 암시는 없다. 다니엘은 인자에 관한 환상에서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가지 않을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단 7:13-14)라고 했는데 ‘권세’는 지배권/통치권을 뜻하며 ‘영광’은 최고 통치권자에게 속한 것이며 ‘나라’는 여기서 왕국 또는 왕권(kingship)을 뜻한다.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가지 않을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14절)라는 말에 비추어서 판단하면 ‘나라’는 왕국/국가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환상을 해석하는 자리에서 다니엘은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이 그 나라를 얻을 것이며 그 나라를 영원히 영원히 소유할 것이다”(18절)라고 했는데 이 경우의 ‘나라’도 역시 ‘국가/왕국’을 뜻한다. 주석가들은 종말적 나라를 차지할 것으로 묘사된 ‘인자 같은 이’(=어떤 천상적, 초월적 존재)와 ‘성도들’(=지상의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곤혹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 둘을 동일한 존재로 일치시킬 필요가 없다. ‘다윗(의) 왕국’이라 하면 그것은 통치권자를 기준으로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왕국을 또한 ‘유다(의) 왕국’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 왕국의 백성을 기준으로 하여 붙인 이름이다. 즉 ‘유대인들/유대 민족의 왕국’이라는 뜻이다. ‘인자의 나라’는 인자가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뜻하며 ‘성도들의 나라’는 성도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 있는 나라를 뜻한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다니엘은 네 짐승들의 환상을 해석하는 자리에서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the people of the holy ones of the Most High)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들을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27절)라 했는데 이 경우의 ‘나라’도 역시 종말적 나라를 뜻한다. 거룩한 백성은 이 나라의 국민을 가리킨다. 다니엘서에는 하나님이 이 종말적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 직접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여 왕권/통치권/지배권을 행사하실 것이라는 언급은 없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인간의 모든 나라들을 역사의 무대 배후에서 조종하시는 분으로 고백되었다. “이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인간의 나라를 지배하신다는 것과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것과 지극히 낮은 사람을 그 위에 세우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단 4:17). “그 때에야 비로소 부친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게 되셨습니다”(단 5:21).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를 운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데 ‘그의 나라’, ‘그의 통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나라 영원하고 그의 통치 대대에 이를 것이다”(단 4:3). “그의 통치 영원하고 그의 나라 대대로 이어진다”(단 4:34). 이 두 경우의 ‘그의 나라’는 종말에 비로소 세우실 그의 나라 또는 종말에 비로소 행사하실 그의 통치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의 역사 운행하심을 뜻한다.

4.3. 중간기의 묵시문학적 문헌은 하나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거룩하신 분이 그의 거처에서 나오실 것이며 세상의 하나님이 시온 산 위에 발을 딛고 서실 것이다”(에티오피아 에녹서 1:3). “그런 다음에 그의 나라가 그의 모든 피조물 위에 나타날 것이다. 그 다음에 그 악마는 끝장이 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일어서실 것이며...이방인들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나서실 것이다”(모세 승천기 10:1-3).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그들을 다스리실 것이다”(12 족장의 유언집 5:13). 에녹서의 비유장(37-71장)에서는 인자의 등극과 심판 활동에 대한 진술이 있다. “만왕의 왕으로 불리시는 주님이 인자를 영광의 보좌에 앉히신다”(62:5; 63:4; 68:1). “인자는 왕의 기능을 취하시고 지상의 모든 왕들을 심판하시며 파멸하신다”(46:4-5; 48:4,5,10; 62-63). “그 나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다”(1QM 6:6). “이 하나님은 지상의 나라들과의 전쟁에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실 것이며 정의와 복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1QM 12:10,12). 유대교의 랍비 문헌에 “하나님 나라의 멍에를 짊어지다”, “하나님 나라를 짊어지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뜻한다. 유대교의 회당 예배의 끝마침 기도인 카디쉬(kaddish)에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여러분의 생전에, 그런데 그것도 빨리 그리고 가까운 때에 세우시기를 빕니다”라는 문구와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씩 드리는 18 기도문의 11 번째에 “오직 당신만이 우리들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소서”라는 간구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기도문이 서기 1세기에 이미 통용되었는지 확정할 수 없다. 정통 랍비적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든가 하나님의 종말적 역사 개입에 희망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활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탈굼(Targum)이다. “만군의 야훼께서 왕이 되실 것이다/다스리실 것이다”(사 24:23)를 탈굼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온 산에 나타날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만군의 야훼께서 내려오셔서 시온 산 위에서 싸우실 것이다”(히브리어 성서 이사야 31:4; NRSV 참조할 것)는 탈굼에서 “만군의 야훼의 나라가 나타나서 시온 산 위에 거할 것이다”로,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사 40:9)는 “너희의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다”로, “너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 52:7)는 “너의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다”로, “나 야훼가 그들을 시온 산에서 다스리겠다. (도성 시온의 산아) 너의 이전 통치가 회복되고 도성 예루살렘의 왕권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미 4:7,8)은 “너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 더욱이 이전의 통치권이 예루살렘 주민의 나라에 올 것이다”로, “너의 멸망이 왔다”(겔 7:7,10)는 “그 나라가 너희에게 나타났다”로, “나라가 야훼의 것이 될 것이다”(옵 21)는 “하나님의 나라가 땅의 모든 거민들에게 나타날 것이다”로, “야훼께서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슥 14:9)는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모든 인간에게 땅 위에 나타날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탈굼에 사용된 이 ‘하나님의 나라’ 어구의 용법이 신약성서에 사용된 ‘하나님의 나라’의 본래적 의미를 규명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왕이 되신다/오신다”는 것을 탈굼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난다”라고 번역했다. 이것을 역으로 뒤바꾸면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통치하실/왕이 되실/오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유대교의 예언적·묵시문학적 종말 이해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의 삶과 활동, 죽음과 부활과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그를 통해서 그들의 전통적으로 대망하던 종말적 구원의 내용을 체험하면서 종말을 새롭게 이해했다. 그들은 이 예수의 삶과 활동을 통해서 그들의 종말적 희망이 성취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의 이 믿음, 종말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가 정당한 것이냐는 물음의 가부는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첫 출발점에서부터 뛰어넘을 수 없는 난관이 가로 놓여 있다. 첫째로, 종말에 관한 예수의 진정한 말씀(ipsissima verba Jesu)을 확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녹음기로 녹음한 본래 그대로의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오랜 전승 과정과 복음서 기자들의 손질을 거쳐서 간접적으로 전달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설령 종말에 관한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확정한다 하더라도 예수의 종말 사상을 올바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예수의 설교 현장에 몰래 설치해 놓았던 녹음기가 오늘 발견되어 예수의 진정한 말씀 모두를 재생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의 종말 사상을 자동적으로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당시에 예수의 설교를 직접으로 들은 청중들은 모두 예수의 뜻을 올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거의 다수가 예수의 뜻을 곡해했다. 예수의 종말 사상을 규명하는 것은 단지 종말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종말 선포와 그의 선교 활동을 불가분리적 관계로 연관시켜 해석해야 달성된다고 한다. 옳은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난관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의 선교 활동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적인 정보에 접할 수 없다. 둘째로는, 비록 우리가 예수가 하신 일에 대하여, 가령 그 곳에 설치해 놓은 몰래 카메라를 통하여, 사실 그대로의 정보를 입수한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그 일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선교 활동의 현장에서 그의 귀신 축출의 기적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모두 이 사건의 종말적 의미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어쫓는다고 생각했다. 더러는 예수가 하나님의 힘을 빌어 이 기적을 일으키신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더러는 이 기적 사건 속에서 그들이 대망하던 종말적 구원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는 기적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기적 사건에 대한 이러한 여러 가지 이해 가운데서 어느 것이 올바른지는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가 그의 믿음/신념/가치관에 따라 결단할 일이다.

5.1.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으로 증언한다.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의 임박한 도래를 단지 고지하신 분이 아니라 그 종말을 가져오신 분, 그 종말적 구원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자신이 종말적 사건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라는 인물의 탄생, 그의 삶과 활동, 나아가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종말적 사건이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하나의 통일체로서 종말적 사건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예언적-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의하면 종말적 구원 사건은 하나님이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행하시는 행위이다.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으로 증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종말적으로 행동하셨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지혜 교사나 율법 학자로 보거나 하나님의 미래 계획을 예고하는 예언자로 보기를 요구하는 것 이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행동하신 분으로 보았다. 그들은 예수의 몸짓에서 하나님의 몸짓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으로 선포한다면 그렇게 선포하는 일 자체도 종말적 사건이며 그러한 선포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행위 그 자체도 종말적 사건이다. 우리는 지평선을 바라볼 수는 있으나 지평선에 발을 디디고 설 수는 없다. 우리는 역사 내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우리는 종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 종말이 우리 손아귀 속에 들어왔다면 그것은 본래적 의미의 종말이 아니거나 본래적 종말이 우리 손에 닿는 순간에 역사라는 구조물은 폭파되어버렸을 것이다. 놀랍게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묵시문학적인 종말 사건을 신화적인 것으로 제거해버리거나 그것을 의미적으로 세계내적인 어떤 가치로 대치하지 않으면서 바로 그 종말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종말 이해가 정당한지 부당한지 판단할 어떤 객관적 척도가 없다. 왜냐하면 종말 사건은 종말 사건을 통해서만 식별되기 때문이다. 종말 사건은 객관적인 관찰자의 눈에는 지평선 저쪽에서 떠오를 따름이다. 그렇게 하면 그는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관념적 종말을 찾아 헤매는 종말론 미아(迷兒)가 될 따름이다. 종말 사건은 그 종말 사건 속에 발을 디디고 들어서는 사람에게만 종말 사건으로 체험된다. 우리는 신약성서를 통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종말 사건의 체험에 대한신앙 고백적 증언을 접하게 된다.

5.2.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선포를 증언한다. 이 증언 속에는 예수의 진정한 말씀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윤색이 선명하게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종말관을 따로 떼어내어 규명한다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공관복음서의 종말론이 예언적 종말론 및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극명한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첫째, 예수의 선교 활동은 묵시문학적인 종말 전망 속에서 행해졌다. 그것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막 1:4)는 보도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하나님에 대한 기쁜 소식, 즉 하나님이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뜻한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등장하시는 것은 종말적 구원 사건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다. 바알세불 논쟁(막 3:20-20 병행)은 예수의 귀신 축출 활동이 선신과 악신 사이에 벌어지는 묵시문학적인 종말적 투쟁의 맥락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인자의 오심과 최후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언급에서도 이 사정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는 예수가 예언적-묵시문학적 종말론과는 달리 그의 종말 선포에서 하나님을 종말적 사건의 직접적 행위자로 서술하신 적이 거의 없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왜 그를 버리셨느냐고 절규하셨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아니 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과부와 재판관 비유의 적용문에서 하나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의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곧 찾아주실 것이라고 하셨다(눅 19:7,8). 예수는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서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하고 명령하셨으나 치유 행위를 실연(實演)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종말적 사건을 일으키시며(1-3 청원) 인간의 일상사를 돌보아 주시는 분으로 제시되었으나 거기서는 ‘하나님’이라는 명사 대신에 ‘아버지’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 뒤에서 사건을 연출시키시는 분으로 제시되었을 따름이고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행위를 실연해 보이시는 분으로 서술되지 아니했다.

둘째, 예수가 지혜 교사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자연 질서까지도 현재 이 순간에도 관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실 때에는 하나님은 행위의 주체로 제시되었다(마 6:30; 눅 12:20,28). 이러한 사상을 표현할 경우에는 행위의 주체를 ‘아버지’라 지칭한 경우가 많다(마 6:4,6,14,15,1826,32; 7:11).

셋째, 예수는 종말적 구원과 관련된 사정을 진술하실 때에는 거의 배타적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전문 용어가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묵시문학적 예언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묵시문학적 예언에서 종말적 구원 사건의 극치--완성 점--는 하나님이 몸소 역사 속에 오시는 것, 하나님이 역사의 무대 위에 나타나시는 것, 하나님이 사람에게 찾아와서 만나주시는 것이다.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는 현재의 불의한 역사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은 이 현실의 역사를 심판하고 끝장을 내리시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 행위의 목표는 세상을 심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시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종말적 통치 행위를 일컬어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것, 하나님이 왕권/지배권/통치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하나님의 나라’(히브리어 표현으로: malkut Yahweh)는 어구는 하나님이 왕이 되심,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심, 하나님이 다스리심, (행위 명사와 그 의미상의 주어가 결합된 것인) 하나님의 통치/지배/다스림을 뜻한다. 원래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하나님의 나라/그의 나라’라는 표현에서 ‘나라’는 ‘왕국/왕권’ 등의 소유물을 뜻하고 소유격 명사 또는 소유격 대명사는 소유주(所有主)를 표시하는 경우가 없었다. 만일 그러한 의미를 나타내게 되는 경우에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근본 성격이 상실되어버린다. 왜냐하면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구원 행위를 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이 구원 행위를 하시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강조하는데 하나님을 사물의 소유주로 제시하는 것은 여기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소유격 명사/대명사가 행위자를 표시하는 경우와 소유주를 표시하는 경우의 의미상의 차이점을 명확히 밝혀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태종(太宗)의 등극, 태종의 출정, 태종의 왕림(枉臨)을 연극으로 연출하려면 태종의 역을 맡은 배우가 무대 위에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이와 달리 태종의 사가(私家), 태종의 전답(田畓), 태종의 후궁들을 연극으로 나타낼 경우에는 태종의 역을 맡은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할 필요가 없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과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 사이에 의미의 중대한 굴절이 생겼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에서 의미의 무게 중심은 전적으로 ‘나라’ 쪽으로 옮겨가고 행위자로서의 하나님의 의미는 거의 사라졌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소식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 말씀을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다”라는 뜻으로, 또는 “하나님의 오심이 가까웠다”라는 뜻으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약속하신/정해 놓으신/이루실) 그 종말적 구원의 시대/현실이 다가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경우에 하나님이 그러한 나라를 주시기로 약속하셨거나 정해 놓으셨거나 이루시는/세우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행위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그러한 일을 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연극의 연출자가 무대 뒤에 숨어서 무대 위의 사건을 진행시키듯이 초월적인 곳에 숨어서 그렇게 되도록 조종/작용하시는 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다/얻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다’ 등등의 표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적인 구원의 시대/현실, 종말적 구원이 실현된 영역 등을 뜻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 또는 ‘영생’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막 9:47과 9:43,45 비교; 눅 18;18과 24비교; 마 25:34와 막 10:17 비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 ‘인자의 나라’, ‘아들의 나라’라 불리기도 하고 절대적 용법으로 ‘그 나라’라고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는 행위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완전히 탈락되어버렸다.

종말적 구원 사건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예수의 종말 선포에서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 등에서 하나님은 이미 종말론적으로 인간사에 개입하시며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고 계시는 분으로 제시되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이 장차 인자를 보내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회복해 주실 분으로 제시되었다(눅 18:8).

종말적 구원 사건의 정점을 이루는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실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말씀에 속하는지 교회의 작문인지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상반된 주장을 어느 한 편으로 말끔히 해결짓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말씀을 역사적 예수에게 귀속시키기를 거부하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문을 던질 수 있다. “만일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역사적 예수에게 귀속되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도 역사적 예수에게 귀속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긍정과 부정 두 가지 답이 있다. 여기서 나는 해답의 철저한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누구든지 자기 견해의 일관성을 철저하게 견지하려면 두 가지 말씀(=인자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 다 역사적 예수의 것임을 부정하든지 긍정하든지 해야만 한다. 인자에 대한 말씀은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은 긍정하는 것은 방법론적 철저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만일 둘 다를 부정하면 역사적 예수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즉 예수는 전혀 묵시문학적-종말론적 설교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삶의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지혜 교사이며 자연적인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방랑 시인으로서 기존의 정신적 가치 질서의 전도를 꿈꾸는 냉소적인 현자일 따름이다. 이것은 철저한 합리주의적 탈신화론자로 만들어진 20세기의 예수의 모습이지 1세기에 태어나 사셨던 그 예수의 모습일 수 없다.

천상적 초월적 존재인 인자의 오심에 대한 말씀은 진정한 예수의 말씀이며 이 인자와 예수를 동일시한 말씀은 원시교회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기존의 비판적 입장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는 종말적 구원에 대한 희망을 품고 활동하신 분이다. 그는 그의 동시대인들의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인자의 오심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과 그 후에 있을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확실한 미래의 사실로 전제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는 묵시론자들과는 달리 그 종말의 때를 교묘하게 계측하거나 종말 사건들의 상세한 내용에 대한 사변(思辨)에 몰두하시지 않았다. 그는 종말적 구원을 선포하셨다. 그렇지만 그는 묵시문학적 예언자들처럼 단순히 종말적 구원의 도래를 고지하는 사람으로 그치신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종말적 구원이 이미 현재의 가능성으로 주어져 있음을 전제하고 귀신축출, 병자 치유, 죄인들과 친교 등등의 사회적 실천 활동을 벌이셨다. 예수의 이러한 실천 활동을 그의 종말적 구원 선포로부터 유리시키면 그것은 단순한 사회 봉사 차원의 자선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둘을 밀접한 관계 속에 넣어서 바라보면 그것은 종말적 구원의 내용을 현실 속에 앞당겨 오는 행위이다. 예수는 종말적 구원의 도래를 입으로 선포하시는 분만이 아니라 종말적 구원의 내용을 몸으로 가져오시는 분이다.

종말적 구원 사건 또는 종말적 구원의 현실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상징을 사용하여 총괄적으로 지칭함으로써 두 가지 중대한 해석학적인 기능이 수행된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예수의 선교 활동을 예언적-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전통에 결부시키는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종말적 활동에 대한 예언적-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신화적 표상들로부터 하나님을 해방하여 역사 속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걸어다니시는 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 위에 더 이상 직접 등장하지 않으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묵시문학에서처럼 우주의 대 격변과 더불어 하나님의 위용을 띠고 출현하지 않으신다. 세례 요한은 오실 분이 오실 것을 예언한 예언자이다. 그는 하나님이 오실 것을 고지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엘리야이다(말 4:5-6; 마 11:14; 17:12).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세례 요한이 오실 분으로 예언한 분으로서 역사 속에 오신 분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 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다. 자기의 존재에 대한 예수의 자의식이 어떠했는지는 밝힐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구성하는 결정적 요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종말적 구원에 대한 구약성서의 예언의 성취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를 임마누엘로 보았으며, 마가복음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누가복음 기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신 아들로, 요한복음 기자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으로 보았다.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는 사람과 하나님, 역사와 종말을 한 점에서 만나게 하신 분이다.

5.3.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로 등장하시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 선포가 없는 대신에 하나님이 구원사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신다(3:16,17,34,36; 6:45; 8:47;54; 9:29; 11:12; 17:3. 이 밖에도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리어 행위의 주체로 등장하시는 곳이 40회 이상이다; 대표적으로 5:21,22 참조). 사도행전에서도 하나님은 예수와 사도들의 활동 속에서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는 분으로 80여회 등장하신다. 특히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이시며(2:24,32; 3:15,26; 4:10; 5:30; 10:40; 13:30,37) 예수를 통하여 모든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 분이시며(2:22) 사람들에게 종말의 선물인 성령을 주신 분이시다(2:17; 11:17).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하신다. 하나님이 행위하시는 분으로 서술된 곳에 바울의 진정 서신에만 90여회 되며 성령이 활동의 주체로 나타나시는 것도 10여회 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요한복음에 의외적으로 두 번 나타나는데(3:3,5) 그것은 ‘영생/생명’과 동의어이며, 바울 서신의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종말적 구원’이라는 의미로 여섯 번 사용되었으며(롬 14:17; 고전 4:2; 6:9,10; 15:50; 갈 5:21) ‘그 나라’(the kingdom)는 그리스도의 왕국/왕권을 뜻한다(고전 15:24). 베드로전서와 요한 계시록에는 종말 사건들의 진행 과정과 모습이 묵시문학적 환상으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연극 공연으로 비유하여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연: 공관복음서 극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을 내걸고 연극이 펼쳐진다. 무대 위에는 예수가 주역으로 등장하신다. 그는 때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선포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귀신축출 행위를 통하여 ‘너희에게’ 이미 왔다고 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시기도 한다. 그는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내어쫓으시며 죄를 용서하시며 죄인들과 친교를 가지신다. 그는 지금이 바로 종말적 구원의 때임을 선포하신다.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는 하나님은 행위자로 무대 위에 등장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대 뒤에서 무대 위의 사건을 조종하시는 분으로도 나타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완전히 숨어 계시는 분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라는 인물 안에서 나타나시는 것이지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는 가끔 초월적 존재인 인자의 오심과 인자가 주관하시는 최후 심판이 다음 막(幕)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시지만 그의 십자가 죽음과 더불어 막은 내려지고 인자의 막은 오르지 않은 채 공연은 끝났다.

둘째 공연: 요한복음 극장에서는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연극이 펼쳐진다. 무대 위에 등장하여 연기를 하는 주역 배우는 예수만이 아니다. 하나님도 행위의 주체로 등장하신다. 요한복음의 무대는 이층 구조로 되어 있다. 아랫 층 무대 위에서는 예수가 활동하신다. 윗층 무대 위에서는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아랫 층에서 일어나는 일에 직접 간섭하신다. 종말적 구원(=영생, 참 생명)은 예수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는 것)이다.

셋째 공연: 사도행전 극장에서는 ‘종말 시대’라는 제목을 내걸고 연극이 펼쳐진다. 주역 배우들은 사도들이다. 사도들의 설교 속에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분으로 등장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을 내려주신다. 하나님과 성령은 사도들의 활동 속에서 일하신다.

넷째 공연: 바울 서신 극장에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우주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제목의 연극이 펼쳐진다. 이 극장의 무대는 땅 위의 어느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전 우주, 하늘에까지 뻗어 있다. 주역 배우들은 하나님, 영적 존재로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시다. 전개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교회 안의 일상사에서부터 역사의 대 종말과 그 후에 일어날 일들에까지 미친다.

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제시된 그리스도 교회의 종말론 연극 속에 주역 배우들의 상대역으로 동원된 주인공들이다. 우리가 그 속에 주인공으로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종말에 관하여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속에서 종말적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객의 입장에 서게 되면 이 연극을 보고 그것에 근거해서 종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오는지 등등에 관하여 물음을 던진다. 특히 첫째 연극을 보고 나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갖가지 분석을 한다. 종말적 구원의 실체에 대한 상징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언제 어떻게 실현되었느냐/실현될 것이냐에 대하여 갖가지 답변이 제시된다. 이러한 답변은 논리적으로 아무리 완벽하고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행위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배제되어 있는 한 그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고 한다. 붕어빵은 살아있는 부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를 묻는 경우에 살아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배제한 채 하나님의 ‘그 무엇’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처음부터 과녁에서 멀리 빗나갔다. 하나님은 미래의 주인이시고 종말은 하나님의 것이다. 종말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희망을 건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에게 궁극적 희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련다.

나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련다(합 3:17-18).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네 안에 계신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6-1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가?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가?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39).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살져 버렸기 때문이다(계 21:3-4).

종말을 향한 역사의 대 드라마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 주시는 데서 완성의 극치에 도달하며 그 다음에 새 역사의 막이 열린다. 휴거나 천년 왕국 등에 관한 일은 역사의 이 궁극적 종점에 이르는 길에 놓여 있는, 건너 뛰어 넘을 수 있는 작은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종말에 관한 물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만 올바른 답이 내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