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에 관해 말이나 글로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도상이나 기호로 단순하게 보여주는 것이 훨씬 이해를 돕고 힘이 있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기호나 상징으로 그려낼 수는 없다. 철학적이며 과학적인 어떤 정밀한 설명을 요구하는 공식 논리를 상징으로 풀어낼 수는 없다. 고도의 수학에서는 여러 다양한 기호들을 합성하여 답을 풀어내지만 약속된 기호와 일정한 공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공식도 상징이나 코드로 본다면 상징이 아닌 것이 없겠다. ‘이것은 독약이니 먹거나 마시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라는 설명 대신 해골을 중앙에 두고 환두 뼈가 교차하는 그림을 그려 넣게 되면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이런 예는 그림이 설명보다 간결해서가 아니라 글보다는 그림의 강한 메시지를 노린 것이다.

최초의 십자가는 단순한 기호에 불과하였지만 이천여년이 흐른 지금은 상징이 되었다. 십자가 표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교차로, 예수의 죽음, 교회, 방위 정도겠지만 십자가가 예수의 죽음과 교회로 들어오게 되면 그 신학적인 설명은 만만치가 않다. 혹시 몰트만이라면 몰라도 일반 신자들은 별의 별 신학서적을 동원하여 오픈 테스트하듯이 해도 이 십자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 어렵겠지만 그 기호를 보는 사람은 그 기호를 통해 여러 다중적인 의미를 즉각 해독하게 된다.

인지하는 사람 역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의미를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 기호 모양은 한 가지가 아니라 그 모양세가 다양하다. 모양세가 다양해도 그 의미는 대개 비슷하니 모양세는 소속집단의 표지이거나 멋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 학교, 회사마다 마크가 있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이 마크가 회사 것인지 학교 것인지를 쉽게 구분한다. 이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코드가 머리에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즉 코드는 경험과 학습으로 일정하게 누적된 보이지 않는 문화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를 보면 이것이 정교회 것인지 가톨릭 것인지 개신교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화풍도 그러하다. 작가 이름은 모를지라도 인상파인지 입체파인지 구분할 수 있듯이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한 작가의 작품 코드를 알면 쉽게 가려낼 수 있다. 교회 건축양식도 마찬가지이다. 한 때 한국 가톨릭교회는 네오 고딕 풍의 교회를 지속적으로 건축했다. 덩달아 장감리교도 자신들의 예전과 전혀 관계없는 네오 고딕풍의 교회를 건축했는데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어 같은 양식 교회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금방 가톨릭교회인지 장로교회인지를 구분했다. 지붕위에 붙어 있는 십자가 모양세가 구분하는 데 한 몫도 했다.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렇게 하겠다고 결정하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행하거나 사용하면 그것은 기호가 되고 도상이 되며 끝내 상징이 될지도 모른다. 한 번 해보자. 나 자신의 기호, 싸인이나 도장, 문장하나 만들어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내 정체성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딱 보면, 아! 그것 누구 것! 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