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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ad: 6474  Name: 김재성  
빈 칸 예수

한신대 교수 에세이집이 나왔다. 내 글도 가운데 들어 있어서 반갑다..^^



<빈 칸 예수>

                                                                                김재성

결핍의 동기

결핍이라고 하면, 부족함이나 가난함과 연관되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관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결핍의 동기는 거의 모든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흘이나 먹지 못하고 곧 쓰러질 것 같은 무리들의 궁핍함이 없었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없었다면, 기적적으로 혈루의 근원이 마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결핍을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일과 기적을 위한 기회로 보았습니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에서 기적의 능력(dynamis)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으로부터 결핍이 있는 사람들 쪽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물이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듯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예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밀치고 있었는데, 유독 그 여인에게로만 능력이 흘러들어간 것은 그 능력을 움직이게 한 동인이 그 여인에게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정신분석가 돌토는, 그 여인이 예수에게서 능력을 끌어냈다고 봅니다. 그 여인은 가난하였고, 무엇인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어딘가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 속에는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과는 달리, 아무런 계획도 가지지 않고 그저 예수님께 부딪치고 몸이 닿았던 사람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흘러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에게 능력이 많아서 흘러넘친다 해도, 우리 속이 구덩이처럼 움푹하게 패여 있지 않으면 그 능력이 우리에게로 흘러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퍼즐의 빈 칸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제적인 군주의 모습이라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하는 신하의 삶을 살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가 온화한 친구의 모습이라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와 다정한 친구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오래된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바울 사도가 쓴 ‘그리스도 찬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찬가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 2:6-7). 이 구절은 흔히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것과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겸허함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로 인용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이런 의미들을 끌어내는 것은 매우 피상적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된 데는 번역상의 문제도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이 구절의 주문장은 ‘그는 사람과 같이 되었다’입니다. ‘자기를 비워서’나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는 주문장을 꾸며주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우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행동이라기보다는 높으신 분이 낮은 인간이 되는 겸허함을 묘사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헬라어 성경과 거의 모든 영어 번역 성경들에서는 이와 달리 주문장이‘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heauton eskenosen)로 되어 있습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고’와 ‘사람과 같이 되심으로써’는 주문장을 부수적으로 설명하는 분사구입니다. 그리하여 위의 구절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오히려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심으로써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비우는 것’은 겸허함과 같은 어떤 덕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행동이며 실천입니다. 이 구절 바로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로써 ‘자기를 비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어떤 도덕적 겸손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신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몸소 이 세상의 빈자리가 되신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서, 심신이 허약한 노약자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탔는데 앉을 자리가 없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거나 노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일어나서 자기 자리를 내어준다면 그것은 그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이와 같이 실제적 도움이 될 수 있는 빈자리를 만들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사두개파 사람들, 대제사장들 그리고 헤롯 왕가와 총독들은 너나없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욕심과 경쟁심으로 가득 찬 그들에게는 어느 한 곳도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빈틈없는 자신들만의 기준을 세워놓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의지할 데를 찾기는커녕, 숨쉬기조차 힘들어서 질식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어딘가 빈 곳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죄 많은 여인들이 가서 허물없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분이었고, 의지하고 밥상을 같이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숫자들을 맞추는 퍼즐 판에서 중요한 것은 한 칸이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빈 곳이 없으면 숫자 조각들은 움직일 수 없고 놀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 칸이 비어 있을 때, 숫자 조각들을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놀이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 대제사장들, 로마총독과 헤롯왕권이 이룩한 공고한 지배체제는 마치 빈 칸 없는 숫자판과도 같았습니다. 그 속에서 작은 사람들은 꼼짝 할 수 없었고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꽉 막힌 숫자판에 빈 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몸소 빈 칸이 되셨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예수의 빈 칸을 메우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생긴 빈 칸을 또 다른 사람들이 메우면서 행복한 삶과 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요한 기자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예수는 고난을 앞두고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 14:2). 여기 두 번이나 나오는 “있을 곳”(mone, topos)은 모두 어떤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피안적인 천상의 공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의 주권이 발휘되는 곳,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 빈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큰 잔치의 비유(눅 14:15-24)에서는, 이 잔치에 초대받은 기득권자들은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지만, 초대 받지 못한 길거리와 울타리 밖 사람들이 잔치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 잔치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몸소 빈 칸이 되신 이유였습니다.

완벽주의의 허상

우리는 살면서 자기 자신에게 어떤 결핍이 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할 수 있고, 성격에 어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신체에 장애가 있을 수도 있고, “이것만 아니면 내가 마음껏 달릴 텐데...” 하는 것들이 꼭 있습니다. 또는 가족 가운데 꼭 그런 문제 있는 사람이 있어서 나머지 가족들을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개 왜 우리는 이런 결점을 갖고 태어났을까, 왜 이런 장애가 있을까, 왜 내게는 이런 가족이 있어서 이렇게 짐을 져야 하나, 하면서 불행하다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으러 오셨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완벽한 사람, 꽉 찬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좀 부족하고 결핍이 있는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나중에는 예수께서 스스로 빈 칸이 되시고 결핍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결핍이나 문제점은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반대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전혀 빈 칸이나 결점이 없는 완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런 예수는 우리에게도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가장 잘 인용되는 말씀은 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이 구절 앞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이런 구절들의 끝에 끼어들 듯이 들어간 구절이 바로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구절입니다. 앞의 내용과 이 구절은 전혀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끝에서는 갑자기 완전하라고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인 6장 36절에서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말들과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말씀의 모델이 된 것은 레위기 19장 2절 “너희의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구절입니다. 그것은 완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마태복음의 완전하라는 구절 또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의 의미가 아니라, 누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부족함이 없으신, 온전하신 분이시니, 우리도 온전히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결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자꾸만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월터 윙크는 이 점을 언어학적 면에서 설명합니다. 즉, 아람어나 히브리어에는 완전이라는 말이나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엔 상당한 이유가 있는데, 십계명의 제2 계명은 모양을 본 따서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출 20:4). 그래서 이스라엘은 시각적인 예술을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서에 사용한 “완전한”(teleios)이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미학적인 단어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기하학적인 모양, 완전한 조각품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시각적 예술이 발달하지 않은 히브리적 사고에서 기하학적 개념인 완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에서도 텔레이오스라는 단어는 윤리적 의미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인 완전함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의 신앙심으로서는 일종의 오만(hybris)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마태 기자는 “완전한(teleios)”란 단어를 신명기 18장 13절,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을 번역한 그리스어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 단어는 “타민”(tamin)입니다. “타민”은 “온전하다, 완성되었다, 끝내었다, 전체, 보전”등을 뜻합니다. 영어성경 NRSV에서는 이 구절을 You must remain completely loyal to the Lord your God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건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탁하라는 뜻이지, 완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RSV, NIV는 You shal[must]l be blameless before the LORD your God로 즉 ‘흠없는’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공동번역은 “너희는 한 마음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만 섬겨라”로, 현대어성경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흠 없이 살아야 합니다”로 번역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타민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들을 찾아보면 거의가 “흠이 없는”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창 6:9; 17:1; 삼하 22:24). 즉 이스라엘에서는 완전(perfection)에 가장 가까운 것은 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윙크는 “완전주의라는 것은 개신교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서구 문화 일반의 유물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허술한 데가 있는 사람

예수께서 우리에게 빈 칸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조금은 허술하고 비어있는 사람들이 될 때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참 좋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심코 얘기하다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가 가기 싫어서 중간에 학교 안 가고 기찻길 가에서 놀다가 집으로 온 이야기, 그리고 시험을 망쳐서 성적이 안 좋았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아마도 아버지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부족하다고 자책을 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하고 눈이 커지고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부모의 부족한 모습은 아이들에게 해방감을 주고 자신감을 주는 긍정적 기능을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행복하게 살려면 부모가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부모가 완벽해야만 자식들이 본받아서 완벽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가 완벽하면 아이들은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자기가 부모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은 부모는 자기의 부족함이나 약함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그래서 주님께 의지하는 가운데 사는 것을 보여주는 부모입니다.

어떤 신자는 담배를 끊지 못해서 늘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른 건 다 잘하고 모범적인데 젊은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다 피운 담배만은 너무나 끊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그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 목사님은 절대로 담배를 안 피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을 만날 때마다 몰래 담배를 피우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그가 존경하는 그 목사님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해방감을 느꼈고 구원받는 느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심리학적으로 그 목사님에게서 많이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에게 은인이었지만 반대로 그에게 굴레요 족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겐 그 목사님의 완벽함보다는 어떤 인간적 결점이 필요했습니다. 완벽한 목사님에게는 빈틈이 없었지만, 비록 꿈속에서라도 담배를 피우는 목사님에게는, 그가 기댈 여지가 있고 빈틈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애연가 신자를 위해서 목사가 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찾아가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가 어딘가 허술하고 비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완전함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빈자리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빈 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빈 칸의 공간에서 우리의 놀이가 시작되었고 하나님 나라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작지만 우리가 선 이 곳에 그런 빈 칸을 만들어가고 넓혀가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곳은 성공적이고 완벽한 사람들보다는, 어딘가 부족하고 빈 칸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일 것입니다. 완벽해서 숨 쉴 틈이 없는 어떤 시스템이라기보다는,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 서로 빈 칸을 메워주는 곳, 그래서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고 평화를 맛볼 수 있는 곳일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빈 칸으로만 흐르는 뒤나미스 예수의 능력이 충만할 것입니다.


DATE: 2013.01.07 -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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