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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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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ad: 4280  Name: 김재성  
<레이닝 스톤>  ―오늘날 성직자가 서야 할 자리
                        
우연히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레이닝 스톤>(Raining Stones)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켄 로치 감독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평을 들었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정겹게 느껴졌다.

영화의 배경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영국의 한 도시이다. 밥(Bob)은 부인과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실직한 40대이다. 그는 카톨릭 신자인데, 딸 콜린이 7살이 되어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성찬식에는 드레스를 입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 드레스 비용이 꽤 비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전에 입었던 것을 빌려 입으면 비용은 전혀 들지 않지만, 밥은 자기 예쁜 딸에게 평생 한번뿐인 그 성찬식에 헌옷을 입히고 싶지는 않다.

드레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밥은 별의 별 일을 다 하게 된다. 하지만 실업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변변한 것일 리가 없다. 하나같이 다 비정상적이거나 위험한 일들이다. 이를테면, 남의 목장의 양을 훔쳐다가 정육점에 판다거나, 보수당 당사에 가서 잔디를 몰래 뜯어다가 다른 곳에 가서 판다거나, 마약 판매와 격투가 난무하는 나이트클럽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 등등이다. 눈물나는 노력을 해보지만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마침내 그는 아내 몰래 대출회사에서 돈을 빌리게 된다. 이 돈을 제때에 갚지 못하게 되자, 대출회사는 텐시라는 악당에게 돈 받는 권한을 넘겨준다. 텐시는, 마약을 팔고, 빚진 돈을 폭력과 협박으로 받아내는, 아주 악질 고리대금업자이다. 그는 밥이 없는 사이에 밥의 집을 찾아와서 밥의 아내에게 온갖 횡포를 부리고, 돈을 갚지 않으면 딸도 밥의 아내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고 돌아간다.

돌아와서 이 장면을 본 밥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패너를 품에 숨겨서 텐시를 찾아간다. 한 술집 지하 주차장에서 밥은 술 취한 텐시와 격투를 벌인다. 텐시는 능숙한 솜씨로 밥을 때려눕히고 차를 타고 가려고 하는데, 밥은 엉겁결에 텐시의 차 앞 유리창을 스패너로 내리치고, 그 바람에 텐시는 지하실 기둥에다 차를 박고 즉사하게 된다. 밥은 애초에 텐시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우연하게 일이 이렇게 커진 것이다. 밥은 텐시의 옷에서 빚진 사람들 명부를 꺼낸 다음 그곳을 빠져나온다.

밥은 신부를 찾아간다. 그는 무슨 일인지 묻는 신부 앞에서 흐느껴 울면서 일어난 일들을 다 설명한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밥은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하겠다고 한다. 그저 신부에게 부탁은 자기 아내가 경찰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듣지 않고 신부에게서 듣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신부는 정색을 하고 밥에게 말한다. 자기에게 이미 찾아온 이상 경찰서에 갈 필요는 없다고. 텐시는 악당이고 그 사람이 죽은 것은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한다. 신부는 밥이 가져온 빚진 사람들 명부를 그 자리에서 불에 태워버리고, 밥에게 그 일을 자기들 둘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지금 고해성사를 하라고 한다. 주님은 분명히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밥은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다음날 밥은 딸의 성찬식에 참석하고, 친구로부터 악덕 고리대금업자 텐시가 만취 상태에서 운전하다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내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신부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그런 행동은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밥이 선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신부를 찾아와서 사실을 털어놓을 때 밥은 흐느끼면서 말한다. 자기는 이때까지 신자로서 착하게 살아왔다고, 바르게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해왔다고. 신부는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준다. 밥은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별의 별 일을 다 했다. 일의 발단이 된 것은 자기 형편에는 맞지 않는 비싼 드레스를 무리를 해서 사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뿐인 예쁜 딸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허영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부잣집 아빠라면 드레스를 빌려 입혀도 꿀리는 것이 없을 것이지만, 가난한 실업자이기에 더더욱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최소한의 아빠 노릇이라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그 드레스 값 110파운드(약 30만 원)가 그렇게 별의 별 짓을 다 해도 벌 수 없는 것이었을 때 그의 좌절감은 어떠했겠는가. 그를 달래면서 그의 장인은 노동자들에게는 일주일 내내 “돌들이 비처럼 내린다”(raining stones)고 넋두리를 한다. 돌들이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져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런 고난의 현실, 그런 진퇴양난의 현실을 ‘레이닝 스톤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밥이 선 자리이다. 그 자리에선 모든 도덕적 물음이 일시적이나마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있다. 성찬식 때 비싼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종교는 그가 따라갈 수 없는 사치일 뿐이다. 아무리 노동부 사무소에 구직신청서를 내도 일거리가 없는 그에게 왜 일하지 않느냐거나 왜 성실하지 않느냐는 물음은 의미 없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아내와 딸을 협박하고 마수를 들이대는 그 악당에게 스패너를 휘두르는 것은 그에게는 마지막 생존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들을 피해보려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 자리, 모든 도덕적, 종교적 물음들이 일시적이나마 정지되고 무의미해지는 자리, 바로 그 자리를 감독은 ‘레이닝 스톤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는 밥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대신에 벽장에서 포도주를 꺼내어 한 잔 따라준다. 그의 고해성사를 받아주고 그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음을 선언한다. 밥에게 그 신부가 준 포도주는 진정한 의미의 성찬이었을 것이다. 밥의 눈물과 담배연기로 얼룩지고 빚진 사람 명부를 태워버린 연기가 자욱한 그 어두운 방에서, 밥이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드리는 모습은 그 어떤 성당에서의 고해성사보다도 거룩해보였다. 바로 그 자리가 밥이 구원받는 자리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바로 그 성찬식과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신부야말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처럼 내리는 돌들, ‘레이닝 스톤즈’ 아래에서 어디에도 희망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 신부는 그렇게 밥과 함께 서 있음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그 신부를 보면서 난 우리 사회의 카톨릭과 개신교의 유명하다는 성직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언론매체에 자주 나와서,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거나 4대 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대통령과 국민을 향하여 훈계를 하고는 한다. 이 나라 노동자들과 민주인사들에게 돌들이 비처럼 쏟아질 때, 그들은 그 돌을 함께 맞으면서 그들을 위해 용기 있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때 노동자들에게 돌을 던지던 기득권 세력들을 개혁하는 일이 이 사회에서 일어나려고 하니까, 그 기득권자들을 위해서는 그들은 그렇게 결연하게 나선다. 그들의 모습이 참 <레이닝 스톤>의 그 신부와 대조를 이룬다. 이 사회의 보수주의자들과 기득권자들을 편드는 그런 발언은 굳이 성직자가 하지 않아도 된다. 굴지의 언론매체들과 기득권자들이 자기들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핏대를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기득권자들을 옹호하고 동조하는 그 자리는 성직자의 자리가 아니다. 성직자가 설 자리는, 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자리, 바로 ‘레이닝 스톤즈’의 자리이다.

DATE: 2004.10.29 - 17:04
LAST UPDATE: 2011.01.25 -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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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그들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 않을까요...?
다만 그 때가 언젠인가의 차이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라는 마음을
열어 놓았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 있습니다.

역사의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까.

곱게 물든 나뭇잎들을 보며
비어있는 들녁을 바라보며

더 깊어지는 생각은 모든 이들을 품을 줄 아는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요즘 더 합니다...
2004.10.29 - 18:08 
조동이
모든 사람을 다 품는다는 말이 제게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한다는 말처럼 불가능하고 그래서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제도적인 교육을 받던 시절 내내 기득권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항상 여당이었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설교에 젖어 살았습니다. 기득권자들은 제 부모이고 형제이고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가지지 못한자들도 내 형제이기에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들이 먼저 품어져야하겠기에....
2004.10.30 - 06:51 
호랑이
의는 오직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저 신앙 양심에 따라 의롭다고 믿는대로 행동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을까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애매한 기준으로 모두를 품자고 하는 '나그네'님의 발언은 오만이거나 자기기만일 것입니다. 더욱이 온갖 욕심과 이해타산에 따라 움직이는 이 세상 '나라' 핑계 대지말고 그저 겸손하게 의롭다고 생각되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2004.10.30 - 15:06 
산모퉁이
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자리에  바른 자세로 아름다운 포즈로 설 수 있을까 ? 그 돌 비를 피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발 닿아있는 땅이라도 꺼지길 바라지 않을까 ...마음이 아프네요
2004.10.31 - 18:56 
나무...
과연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을 모두 품은 절대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하고 가셨을 까요?
아니 모든 이들을 모두 품는 것이 과연 사랑 일까요 란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진정 무엇일까?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란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서의 사랑이 되어 버린건 아닐까? 레이닝 스톤스를 보면서 내내 던졌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칼 같이 단호히 정죄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 였는지 그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기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에게 질문하나를 던져 봅니다. 내가 그 신부의
자리에 있었다면 그리도 자연스럽고 단호하게 그에게 고해성사의 기회를 줄 수 있었을지를....
2004.11.06 -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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