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준비에 사람도 넣어 주세요!

북미에 살았던 인디언은 사실 인디언이 아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조센징이라 불러 모멸감을 주었듯이, 인디언은 백인들이 북미 원주민을 멸시하여 붙인 멸칭(蔑稱)인 것이다. 그들은 ‘북미 원주민’이라 불리길 원한다. 또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에스키모’인들도 그들 자신을 ‘인간’이라는 뜻의 ‘이누이트’라고 불리길 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국인이나 대한 사람이라고 해야지 조센징이나 조선놈이라고 불려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다. 앞서 말한 북미 원주민들은 부족마다 12월에 이름을 지어 불렀다. 예컨대 체로키족은 다른 세상의 달로, 크리크족은 침묵하는 달로, 수족은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로, 퐁카족은 무소유의 달로, 샤이엔족은 늑대가 달리는 달로 불렀다. 우리 민족은 12월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를 잠시 묵상해 보았다. ‘월동(越冬, 겨울나기) 준비하는 달’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내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은 요즘 월동준비로 한창 바쁘다.

예로부터 겨울을 나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식량’과 ‘땔감’ 확보가 아닐까. 겨우내 먹을 양식과 장작더미가 토방마루 밑이나 헛간에 가득가득 쌓여있는 것만 보아도 우리의 겨울은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했던가. 월동 준비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김장이다. 김장은 침장(沈藏)이라는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치를 담궈서 저장한다는 뜻이다. 김치 또한 침채(沈菜)라는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물에 담군 푸성귀나 나물 정도로 보면 되겠다. 배추나 무를 큰 독에 담아 땅속에 묻은 후 물과 소금 위에 고명을 두고 영하의 찬바람 속에서 서서히 변화를 일으키면, 쨍하고 시원한 그 맛이 일품이다. 그래서 어떤 회사는 김치냉장고의 이름을 침채를 부드럽게 변형시켜 ‘딤채’라고 짓기도 했다.

김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는 것과 저는 것, 그리고 알맞게 발효(醱酵)하는 것이다. 어는 것을 얼씨구라 하고 저는 것을 절씨구라 하고 알맞게 발효하는 것을 지화자 좋을씨고라고 하면, 김치야말로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을씨고가 된다. 과학이 발달하여 물자가 아무리 풍부해지고 철학이 보급되어 인간의 솜씨가 아무리 능란해져도 역시 초월적인 종교의 깊이가 없으면 인간의 쨍한 맛은 안 날 것이다. 김치는 역시 얼어서 얼씨구, 절어서 절씨구, 변할 줄 알아서 지화자 좋을씨고처럼 사람도 역시 잘 발효되고 숙성될수록 맛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마치 포도가 발효하여 포도주가 되면 그 포도주는 수십 수백 년이 가도 변질되지 않는 명품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도 역시 마음과 영(靈)에 한 번 번개를 맞으면(회개, 頓悟) 영원히 변치 않는 참 사람(眞人), 곧 진국이 될 것이다. 

올 겨울, 우리 사회 전반에 경기불황이라고 하는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다. 날씨도 춥고 살림살이마저 얼어붙는다면 참 견디기 힘든 세월이 될 것이다. 인류가 쌓아놓은 탐욕의 바벨탑이 여기저기서 허물어지고 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돈(資)을 근본(本)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종말, 세계의 종말을 확인하고 나서야 반성을 하려는 것일까. 자꾸 돈에 밀려나는 사람들의 슬픈 자화상이 올 겨울엔 도드라져 보인다. 경기침체로 인한 구조조정이라는 한파에 거리로 내몰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다수의 서민들에게 올 겨울은 유난히 아득하고 길게만 느껴진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 지나쳐 다시 돌아온 남북 냉전시대에 북녘 동포들의 겨울 또한 혹독할 것이 예상된다. 우리는 참 못난 민족임을 세계만방에 공표하려는가. 이래저래 김치처럼만, 포도주처럼만 잘 발효된 사람들의 나라가 그리워지는 월동준비의 철이다. 훗날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라고 회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영일목사(계곡사정교회) 

이상은 12월 5일자 해남신문 시론에 기고한 글입니다.